*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을 배려하지 않고 편하게 적은 글이니 스포일러가 걱정되시면 읽지 않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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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과 어니스트 _ 필연적인 사랑의 결과

 


  영화 포스터를 처음 봤을때, 그림책 읽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보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예상과는 다르게 갑자기 실사가 나와서 놀랐지만... 짧은 실사 영상 덕분에 '나는 이 영화가 끝날때까지 이 부부의 행복을 바랄 것이다'란 강한 생각이 들었다. 숱한 위인전들 사이에 꽂히게 될, 위대한 책의 주인공이니까.

 

 

  메이드인 에델과 우유배달부인 어니스트. 최초에 그들이 만나는 유일한 통로는 에델이 청소해야하고, 어니스트가 늘 지나치는 골목에 위치한 저택의 창문이었다. 사실 이때 제법 좋았던 게 매일 창문을 통해 소소한 인사를 나누다가 비 내리는 날 타이밍이 어긋나는데, 그랬음에도 다음날 어니스트는 예쁜 꽃다발과 함께 에델을 직접 찾아갔다는 점이다. 그렇게 우연이 필연이 됐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몇 번이나 속으로 생각한 게... '원래 이렇게나 성격이 안 맞아도 결혼을 하는 건가?'다. 보면서 어니스트랑 에델이랑 너무 안 맞는다고 생각한 게 도대체 몇 번인지. '대조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이다. 에델은 시사 문제에 무관심하고 처칠을 지지하지만, 어니스트는 노동당 지지자고. 오히려 각자 성향이 확실히 드러나는 성격 묘사때문에 재미를 느끼기도 할 것 같다. 뭔가 에델이 불안불안해보일때마다 어니스트가 우유처럼 부드럽고 하얗게 덮어줘서 둘 사이가 그렇게 나빠보이진 않았다. 다만 아들(레이먼드)이 태어나고 나선 뭔가 아들이랑 아빠(어니스트)랑 편 먹은 느낌이라 에델이 안타까웠다. 특히 레이먼드가 자라면서 엄마 말은 너무 구식이야 절레절레 하는 태도로 대할때.

 

 

  확실히 매력적인 영화다. 시대상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유배달부인 어니스트의 우유배달 방식 변화도 재미있고, 중간에 어니스트의 어머니가 나오는데 라디오를 꺼달라고, 우리 얘길 듣고 있을까봐 무섭다고 하는 부분도 귀여웠고... 어니스트 세대 시점에서도 신식 문물인 TV의 등장 등 나열할 것이 아주 많을 정도로 세대간의 시대적 변화를 아주 잘 그려냈다. 부부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냈다. 단지 부모님의 이야기를 그려냈을 뿐이라고 했으니, 시대상 나타내는걸 중점으로 유도한 건 아닐텐데. 모두의 삶 속에 촘촘히 시대가 녹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속을 살아가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레이먼드는 시골로 보내고, 방공호를 만들어 생활하고. 전쟁에 밀접하게 닿아있는 계층은 아니어서 꽝꽝 터지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소식 듣는 느낌이기에, 조금 더 역사에 대해 잘 알고 본다면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내용이라든지 신문의 내용 등이 더 재미있게 느껴질 것 같다.

 

 

  어린 시절 레이먼드가 심었던 배 씨앗이 나무가 되어 무럭무럭 자랐을 무렵, 잎이 지듯이 에델과 어니스트의 이야기는 저물어간다. 끝을 보고 있어야 하는 일은 언제나 슬프다. 무슨 일이 있을때마다 에델은 항상 "오, 어니스트."하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엔딩 크레딧과 함께 실제 에델과 어니스트의 사진이 나오는데 그냥 흘려보내기 힘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책으로 남았다.

 

 

 

+ 여담

 


1. 이어폰 끼고 보는데 장면장면마다 어떤 소리가 날 지 생각해서 넣었다는 점이 무척 신기했다. 손을 움직일때 옷깃이 스치는 소리라든지.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에선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까지 올 때 점점 소리가 커진다든지. 그림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제작 기간이 9년이라던데 정말 대단하다.

 

1-2. 이어폰 끼고 봐서 폭탄 터지는 구간에서 귀도 같이 터질 뻔함

 

2. 흰 우유가 그렇게 맛있어보이는 건 처음이다

 

3. 레이먼드 자식아 있을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그리고 레이먼드가 데려온 여자애 너무 마음에 안 듦... 에델이 말하는데 듣지도 않고 돌아서서 담배 피고 있고.

 

4. 소시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넓고 좋은 집을 처음에 얻어서 조금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우리나라가 집값이 비정상적인 거라고 함.

어니스트는 맥가이버 수준이다. 에델이 원하면 뚝딱뚝딱 해주는 느낌.

 

5. 타 블로그에서 감상평을 보고 아주아주 좋았던 구절.

 

평소와 같은 출근길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를 예정이다. 어니스트가 매일 같이 다니는 길목에 있는 집들 중 하나의 창문에서 노란색 먼지 수건이 흔들흔들 인사를 건넬 테니까. 그리고 그 노란색 먼지 수건을 든 이름 모를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될 테니까.

 

다음엔 나도 이런 식으로 감상평을 써보고 싶다.


6. 끝나갈 무렵, 병상에 누운 에델과 어니스트의 모습을 너무나 해골에 가까울 정도로 그려내서... 섬짓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슬픔이 묻어나는 무채색. 그림을 보면서 꽤 괴로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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